"선생님은 어릴 적에 어떤 학생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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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 CAL EDU
- Date 23-05-2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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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쌤]
저는 초등학교 4,5, 그리고 6학년을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파견으로 인해 샌디에이고에서 아주 좋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오빠를 국제 학교에 보내는 대신 동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영어도 빨리 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공립학교에 보내셨습니다. 당시 알파벳을 겨우 외우고 간 저는 약 한 달 동안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지내다가 곧 동네 친구들도 생기고 학급 친구들도 생기며 참 열심히도 놀았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만 집에 던져놓고 동네 아이들과 매일같이 야구, 농구, 축구, 하키, 인라인스케이트 등의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운동과 친해졌고 아버지 역시 주말마다 저와 오빠와 함께 공원에 가서 다양한 운동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6학년이 되던 3월 미국에서는 학기가 거의 끝날 때 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2년이라는 시간이 저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영어에 대한 기본 감이 생긴 것은 물론, 소심하고 소극적이기만 했던 제가 제 의견을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다양한 운동을 좋아하게 된 것도, 친구들을 편견 없이 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의 환경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온 이후에도 계속 운동을 좋아하는 초등학생으로 지내던 와중, 어느 순간부터 놀이터와 공원에 저의 또래 친구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저는 엄마께 부탁해서 처음으로 6학년이 끝나는 겨울 방학 때 공부와 관련된 학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해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제가 공부를 잘 하는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라서인지 (6학년을 제외한 미국에서의 성적은 거의 바닥이었기 때문에…)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초반의 공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중학교 첫 시험에서 반에서 2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셨었기 때문에 그 때 부모님의 반응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도 놀라고 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 이후로 저에게 ‘공부 잘하는 애’라는 타이틀이 생겼고, 그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운동도 좋아했었기에 성적 유지를 보다 더 쉽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교 2등에서 5등 사이를 오가며 뿌듯하고 기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와중 뒤늦게 외고에 가볼까라는 욕심도 잠깐 생겼었지만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던 터라 낙방 후 미련 없이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전교생 300여 명 중 졸업 석차 백분율 1.08%는 아직도 기억나는 너무나도 뿌듯한 숫자입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소위 말하는 어디 학교 전교 몇 등의 타이틀을 놓치지 않으려 끊임없이 공부했습니다. 이과인 데다가 수의과에 진학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한 것 같습니다. 수학을 너무 좋아해서 고등학교 3학년 당시, 1학기 수시에 합격해서 2학기 성적이 중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학 학원을 계속 다니며 심화 미분과 적분, 심화 확률과 통계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간에 진로를 바꿔 문과 쪽 진학을 결정하면서 토플 성적과 영어 에세이, 그리고 영어 면접이 중요해졌을 무렵, 스스로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하루에 단어 500개와 그 동의어 5개씩 이상 외우기, 제가 제일 약하다고 생각한 writing 보충을 위해 글 5개 쓰고 revision 반드시 마치기 등 제가 기억나는 목표를 반드시 채우고 하루를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독해 지문들과 문제들은 너무 많이 풀어서 모든 유형을 외우다시피 공부도 했었습니다. 목표가 같은 친구들끼리 학원에 늦게까지 남아 학원 문을 잠그고 가고, 학원에 제일 일찍 나와 문을 열고 가기도 여러 번 이었습니다.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었던 1년이었습니다.
대학교 때도 후회하지 않을 생활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공부에 아직 질리지 않았던 저는 4년 내내 성적 장학금을 받았고, 과 성적 상위 10%, 복수 전공 성적 상위 5% 이내에 들어서 전공이었던 독일어와 복수 전공이었던 영어학과에 대해 둘 다 교직 이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두 과목 다 교직이수를 하여 독일어와 영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졸업장과 함께 취득하게 됩니다. 동아리 회장을 하고, 스터디 그룹을 만들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독일어를 더 잘하고 싶어서 1학년 때부터 방학마다 독일에 있는 어학원에 직접 한 달, 두 달씩 다니면서 독일어 실력도 쌓았습니다. 3학년 때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합격하여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에서도 수업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수시 합격 이후 대학교 졸업 때까지 독일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곤 과외와 학원 아르바이트도 단 한번도 쉬지 않으며 용돈도 벌며 제 경력도 쌓아왔습니다.
고등학교 방송부 활동도 해보고, 대학교 때 공연 동아리 회장도 맡으며 학업 외적인 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잘 놀아야 또 잘 공부하기 때문에 학창 시절 내내 스트레스 해소는 저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동안에는 친구들과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다양한 곳으로 여행도 다녔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겨울 방학 때마다 스키와 보드를 타러 다니며, 꼭 배우고 싶었던 기타도 배우고, 좋아하는 노래도 실컷 불러보고, 재미 삼아, 경험 삼아 Superstar K라는 오디션에 참가한 적도 있답니다. 사실 공부든 취미 생활이든 스트레스 해소든, 우리 CAL EDU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그에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업적인 면이든, 학업 외적인 면이든 저희 부모님이 단 한번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하는 결정을 항상 존중해 주셨고 지지해 주셨을 뿐, 절대 판단하시거나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의 지지 하에 나에게 맞는 공부 방법, 나에게 맞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만 제대로 찾아도 모든 방면에서 몰라보게 효율성이 올라갈 것입니다. 남들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공부하고, 남들이 저렇게 해서 거기에 흔들린다면 결국 나만을 위한 해결책은 끝까지 찾기 힘들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꼭 이루고 싶다면, 잘 놀고, 열심히 공부하며, 건강한 습관을 유지하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이 부분에 대해서도 꼭 심도 있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J 쌤]
Potential. Especially as a high school student, I heard this word often when it came to describing the quality of my work, who I was as a student, or my future. Sounds positive, right? That’s certainly how I took it at the time, but as I looked back on these memories as an adult, I realized how accurately this single word describes who I was back then: a student with some positives, but who was capable of so much more.
To tell the story briefly, my family strongly valued education, so I was raised with good academic habits. After all, as an only child, it was also harder to escape or avoid the consequences when I made mistakes. Yet my motivation waned academically in my late middle school and early high school years. I had been very fortunate to have a pure, sheltered childhood, and some of the realities of life started to say hello at that time. My parents began their path toward divorce, I struggled to cope with death through the loss of my grandmother, and yes, I experienced high school relationships like what you see in many Hollywood productions.
I didn’t lose all of my good foundation, however, and I certainly looked like a student with potential. Most days, I paid attention in class and took notes diligently. With the help of sports and extracurriculars, I also became comfortable taking tests and performing under pressure. But over time, classwork and reading needing to be done at home started to disappear. Essays and projects became rushed, and my interest and effort weren’t consistently visible from my teachers’ perspectives. I definitely heard more about my “potential” in my last two years of high school than in the first two.
At that time, I thought my teachers were being kind and supportive, and so I took their messages as only something positive. One of the great ironies of my life is that as a teacher today, I now know that yes, they were being very kind and supportive. But they were also powerless because of my own declining engagement. My choices and journey showed them that I was not yet ready to accept all they had to give me, and so I tied both their hands and my own. Even still, they showed me this kindness.
My academic journey from that point was a long, uphill one, as you can imagine, but that’s not my focus here. Instead, as I’m sure you see, potential is a word I don’t use very often, even today. Yet I am learning every day to be grateful for it. I still carry the wisdom of lessons such as these, that my teachers have passed on to me, and I often find myself sharing this story with our CAL EDU students to help them navigate their own academic and personal roller coasters. Each time, I feel my teachers smiling over my shoulder.
[Hannah 쌤]
전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아이였습니다.
지금 단연코 선생님들 중에 가장 목소리가 큰, 발자국 소리도 제일 큰, 화났을 때 보이는 눈의 흰자 부위도 제일 큰, 덩치도 제일 큰 한나 선생님과는 영 안 어울리는 모습이지만, 전 정말 방구석에 앉아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그런 아이였죠.
공부는 늘 잘하는 편이었고 (죄송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정말 무서운 엄마의 얼굴이 떠 올라서 전 당연히 서울대에 가야 하는 줄 알던 그런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영재교육도 받았고, 교육청에도 여러 번 불려 갈 만큼 동네에선 나름 제일 똑똑하다고 소문난 그런 아이였는데……. ㅠㅠ
갑자기 이민을 오게 되고, 초등학교 5학년을 미국에서 시작하게 되었죠.
처음엔 정말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한국에서 공부를 잘했던 말았던 다 필요 없고, 외국어로 모든 과목을 공부하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자꾸 수업 시간에 미국쌤이 삼발이 삼발이… 실험 시간에 쓰던 알코올 버너 올려놓는 삼발이가 발이 세개라서 삼발이 아니었나? 모르는 단어인 Somebody 가 저한테는 그저 자꾸 삼발이로 들리고…
부모님의 기대치는 하늘을 찌르는데, 학교에는 백인들만 있고, 영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에 하루 종일 A, B, C 알파벳만 쓰던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이를 악물고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던 일이 있었는데요….
그날도 선생님은 제게 영어로 뭐라 뭐라 하셨습니다. 물론 전 못 알아들었죠. 한참을 뭐라 하시다가 제 공허한 눈빛을 눈치채시고는 어디선가 남학생을 한 명 데리고 오셨습니다. 와우, 얼마나 반갑던지요. 다 백인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동양인이라뇨…
그 친구가 선생님과 뭐라 뭐라 하더니 제게 다가와 매우 어색한 발음으로 이야기 합니다.
Ummm … Listen …. 내일…… um ….. 내일……. Um ….. 피크닉 가. 런치 브링.
피! 크! 닉! 그리고 런! 치! 제가 아는 몇 안 되는 단어들이었죠.
뭐라고? 소풍 간다고? 아싸!!!!
그 뒤로도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엄… 내일…. 내일….. 엄….. 피크닉…. 런치 브링…해
알았다고!!! 전 휘파람을 불며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도시락을 싸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늘색 멜빵 바지에 도시락을 껴안고 학교에 갔는데, 이게 웬일? 다들 그냥 평범한 복장으로 수업을 하고 있었었습니다. 기분이 쎄에… 했지만, 설마..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다가오시더니 책을 꺼내라는 겁니다.
“노 북 투데이. 피크닉 투데이.”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막 화를 내시면서 또 알아듣지 못할 말을 뭐라 뭐라 하시는 겁니다. 정말 저도 많이 화가 났습니다.
쉬는 시간에 울면서 뛰쳐나가서 어제 그 동양 남자애를 쥐 잡듯이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 친구가 보이는 순간, 뛰어가서 따져 물었습니다.
“야! 네가 오늘 피크닉 간다며? 런치 가지고 오라며?”
그랬더니 그 친구가 엄청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내일…. (침 한번 삼키고) 엄…. 내일…..
아뿔싸… 내일 모레를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그렇게나 내일 내일을 여러 번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입양아였고, 한국말을 많이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너무 답답한 선생님께서 온갖 수소문을 하셔서 제게 통역을 시켜주신 것 이었고,
Day after tomorrow …. 이 말을 한글로 말하지 못해서, 내일…. 그리고 또 내일… 이라고 표현한 것을 저는 내일을 강조하는 줄 알고 책가방 팽개치고 도시락만 달랑 들고 학교로 갔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반 전체가 비웃는 상황.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던 그 날 이후로 저는 정말로 닥치는 대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전학을 하고 6학년을 마칠 때에는 졸업생 대표로 미래에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에 대한 연설을 하기도 했고, 중학교 졸업식에도 전교 학생회장 자격으로 졸업사를 맡았습니다.
언어가 부족하면 움츠려 드는 어깨는 물론, 자격지심, 불안감이 함께 옵니다.
언어가 능통하면 어딜 가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영어 실력이 탄탄해지면서, 학교 생활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소극적이었던 성격도 활발하고 리더십을 갖춘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에게도 최대한 빨리 언어장벽을 넘을 수 있게 해 주고 싶고, 문화도 이해하도록 하고 싶고, 어쩔 수 없이 겪게 될 좌절과, 그것을 극복했을 때에 함께 따라오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 주고 싶습니다.
[Ted 쌤]
저는 어릴 적부터 친구들을 좋아하는 활발한 학생이었습니다. 한 해도 학급회장은 빼놓은 적이 없고, 학생회와 전교회장도 했습니다. 공부도 늘 곧 잘했고, 학교에서 열리는 경시대회, 미술대회 등에서는 날 상위권에 있었습니다. 학교 대표로 구연동화 대회에 나가서 전국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적도 있고, 다른 대회에서도 많이 입상했습니다. 소위 말해 ‘모범생’으로 살았습니다. 늘 옆에는 어머니께서 함께 해주셨는데, 어머니는 한 번도 저에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 대회에서 상을 받아야 한다 강요하셨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늘 그림자처럼함께 해주시고 옆에서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께서 기뻐하는 그 모습이 다 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끊임없이 학업적으로 노력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자라던 당시에 쇼트트랙을 배웠다거나, 단소와 플룻 그리고 클라리넷을 배웠다는 것은 사실 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특이한 것을 시켜주려는 어머니의 부단한 노력 덕분에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것들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영어도 조금 남들보다 일찍 배웠습니다. 제가 영어학원이라는 것의 문턱을 밟아본 것은 7살 때입니다. 그 당시 다니던 유치원에서 영어 수업이 있었는데 영어선생님의 권유로 어머니께서 영어학원을 보내기로 마음 먹으셨다고 합니다. 토종 한국인치고 제 영어 발음이 들어줄 만한 것은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던 것이 한 몫 한다고 믿고 살고 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첫 시험에 전교 4등을 합니다. 졸업할 때까지 전교 10등 안에는 계속 들었으며 공부는 줄 곧 잘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또래 친구들에 비해 배움의 의지도 컸고, 어머니께 다니고 싶은 학원, 원하는 과외 선생님을 정확하게 알아와서 부탁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더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고 하기 싫어하는 것은 강요하지 않고 다만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만 인지시켜 주셨던 저희 어머니의 확고한 교육철학 덕분에 저는 항상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컸습니다.
늘 승승장구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뒤늦게 외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1년 이상 준비를 했던 것을 저는 급하게 준비하면서 결국은 첫 실패를 맛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어머니께서는 실패도 경험으로 삼고 배우는 것이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그 패배의 슬픔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저는 고등학교 내내 영어 공부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반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다시 전교권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였고,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교장, 교감선생님은 저는 당연히 서울대학교에 가야 하는 줄 아셨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다시 한 번 시련이 찾아옵니다. 저는 사실 시험에 좀 약한 편입니다. 시험일에는 긴장을 잘해서 그 긴장감으로 평소 실력보다 점수를 잘 받지 못하는 편입니다. 평상시의 내신은 잘 받았지만, 수능 당일 수능을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못 보면서 목표했던 서울대 진학은 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서는 재수 비용 전액 지원해 줄 테니 제발 다시 공부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 당시에 합격한 지금의 제 모교로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저의 생활에 후회가 없었고, 합격한 학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서 그냥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저에겐 더 큰 시간적인 이득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학교에 진학하여 대학교 4년 과정 그 누구보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 당시 대학원에 진학하여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한시도 쉬지 않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복수 전공까지 하면서 학점은 4.5를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4년 만에 학부과정을 졸업하고 이어서 대학원에 석사과정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원 석사과정도 정말 열심히 하여 마무리했습니다. 대학교와 대학원은 부모님께 도움이 되어드리고자 거의 전액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고, 대신 부모님께서 준비해두셨던 비용의 일부를 지원 받아 방학에는 열심히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것이 제가 학생으로서 살아온 모습입니다.
써 놓은 글을 보니 상당히 공부만 하고 산 재미없는 사람으로 보이네요. 하지만 저는 할 것도 다 해봤습니다. 대학교 동아리 생활도 열심히 해보았고, 과 학생회 임원도 했습니다. 친구들과 20대에만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유흥문화도 즐겨보았습니다.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땐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어른들이 훈계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지요. 하지만 옛 어른 말씀 틀린 것 없고, 부모님 말씀 잘 들어서 절대 손해 볼 일, 아니 무조건 득 되는 일만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해야 할 시기에 저의 호기심을 적절하게 잘 자극해 주셨던 어머니의 교육이 없었다면 저는 어쩌면 상당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CAL EDU에서 저도 학생들에게 저희 어머니 같은 교육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시기에 이뤄내면 분명히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뒤따라온다는 것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Mason 쌤]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저는 굉장히 활발하고, 장난기 많고, 목소리도 큰 아이였어요. 그래서 어딜 가나 문제도 많이 일으키고, 친구들하고 많이 싸우고, 또 선생님들께 말대꾸도 많이 하던 말을 안 듣는 학생이었어요. 하지만 공부 할 때는 집중해서 잘 했던 터라 어렸을 때에는 그런 제 자신을 많이 특별하다 생각하고 자존 감이 높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중학교에서도 이렇게 지내면 문제없겠지..”라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중학교를 올라가 첫 시험을 치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처음 제 위치를 알게 되어 나는 잘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였죠. 이후에 사춘기를 겪으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라는 생각과 함께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초등학생 때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힘없는 학생들을 대변해서 나쁜 친구들에게 맞서는 데에 쓰기도 하며 좋은 방향으로 많이 변화했던 것 같아요. 여전히 목소리는 커서 담임선생님께 경례를 할 때 자주 득음을 하냐는 말씀을 종종 듣긴 했지만요. 그렇게 중학교 3년을 공부에 몰두하고 올바른 학생처럼 지냈던 것 같아요. 간혹 저희 어머니가 학교에 방문하실 때 어떤 선생님은 저희 어머니를 부둥켜 안으려고 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부터 생각이 많아졌어요, 고등학교마저 그렇게 피곤한 3년간의 학교생활을 할 자신이 없었고, 또 원래 성격은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저 눈에 띄지 않는 학교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그런 거 나중에 신경 쓰고 공부나 하라”라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고민을 했었기 때문에 더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이후에 공부한 것들이 아깝지 않냐며 말리시던 많은 사람들에게 전혀 아깝지 않다고 더 단호하게 말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미 그만큼 모든 고민과 걱정은 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그 결정이 지금 제가 많은 것들에게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요.
저는 초등학교 4,5, 그리고 6학년을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파견으로 인해 샌디에이고에서 아주 좋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오빠를 국제 학교에 보내는 대신 동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영어도 빨리 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공립학교에 보내셨습니다. 당시 알파벳을 겨우 외우고 간 저는 약 한 달 동안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지내다가 곧 동네 친구들도 생기고 학급 친구들도 생기며 참 열심히도 놀았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만 집에 던져놓고 동네 아이들과 매일같이 야구, 농구, 축구, 하키, 인라인스케이트 등의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운동과 친해졌고 아버지 역시 주말마다 저와 오빠와 함께 공원에 가서 다양한 운동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6학년이 되던 3월 미국에서는 학기가 거의 끝날 때 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2년이라는 시간이 저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영어에 대한 기본 감이 생긴 것은 물론, 소심하고 소극적이기만 했던 제가 제 의견을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다양한 운동을 좋아하게 된 것도, 친구들을 편견 없이 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의 환경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온 이후에도 계속 운동을 좋아하는 초등학생으로 지내던 와중, 어느 순간부터 놀이터와 공원에 저의 또래 친구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저는 엄마께 부탁해서 처음으로 6학년이 끝나는 겨울 방학 때 공부와 관련된 학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해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제가 공부를 잘 하는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라서인지 (6학년을 제외한 미국에서의 성적은 거의 바닥이었기 때문에…)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초반의 공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중학교 첫 시험에서 반에서 2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셨었기 때문에 그 때 부모님의 반응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도 놀라고 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 이후로 저에게 ‘공부 잘하는 애’라는 타이틀이 생겼고, 그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운동도 좋아했었기에 성적 유지를 보다 더 쉽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교 2등에서 5등 사이를 오가며 뿌듯하고 기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와중 뒤늦게 외고에 가볼까라는 욕심도 잠깐 생겼었지만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던 터라 낙방 후 미련 없이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전교생 300여 명 중 졸업 석차 백분율 1.08%는 아직도 기억나는 너무나도 뿌듯한 숫자입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소위 말하는 어디 학교 전교 몇 등의 타이틀을 놓치지 않으려 끊임없이 공부했습니다. 이과인 데다가 수의과에 진학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한 것 같습니다. 수학을 너무 좋아해서 고등학교 3학년 당시, 1학기 수시에 합격해서 2학기 성적이 중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학 학원을 계속 다니며 심화 미분과 적분, 심화 확률과 통계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간에 진로를 바꿔 문과 쪽 진학을 결정하면서 토플 성적과 영어 에세이, 그리고 영어 면접이 중요해졌을 무렵, 스스로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하루에 단어 500개와 그 동의어 5개씩 이상 외우기, 제가 제일 약하다고 생각한 writing 보충을 위해 글 5개 쓰고 revision 반드시 마치기 등 제가 기억나는 목표를 반드시 채우고 하루를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독해 지문들과 문제들은 너무 많이 풀어서 모든 유형을 외우다시피 공부도 했었습니다. 목표가 같은 친구들끼리 학원에 늦게까지 남아 학원 문을 잠그고 가고, 학원에 제일 일찍 나와 문을 열고 가기도 여러 번 이었습니다.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었던 1년이었습니다.
대학교 때도 후회하지 않을 생활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공부에 아직 질리지 않았던 저는 4년 내내 성적 장학금을 받았고, 과 성적 상위 10%, 복수 전공 성적 상위 5% 이내에 들어서 전공이었던 독일어와 복수 전공이었던 영어학과에 대해 둘 다 교직 이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두 과목 다 교직이수를 하여 독일어와 영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졸업장과 함께 취득하게 됩니다. 동아리 회장을 하고, 스터디 그룹을 만들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독일어를 더 잘하고 싶어서 1학년 때부터 방학마다 독일에 있는 어학원에 직접 한 달, 두 달씩 다니면서 독일어 실력도 쌓았습니다. 3학년 때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합격하여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에서도 수업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수시 합격 이후 대학교 졸업 때까지 독일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곤 과외와 학원 아르바이트도 단 한번도 쉬지 않으며 용돈도 벌며 제 경력도 쌓아왔습니다.
고등학교 방송부 활동도 해보고, 대학교 때 공연 동아리 회장도 맡으며 학업 외적인 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잘 놀아야 또 잘 공부하기 때문에 학창 시절 내내 스트레스 해소는 저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동안에는 친구들과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다양한 곳으로 여행도 다녔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겨울 방학 때마다 스키와 보드를 타러 다니며, 꼭 배우고 싶었던 기타도 배우고, 좋아하는 노래도 실컷 불러보고, 재미 삼아, 경험 삼아 Superstar K라는 오디션에 참가한 적도 있답니다. 사실 공부든 취미 생활이든 스트레스 해소든, 우리 CAL EDU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그에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업적인 면이든, 학업 외적인 면이든 저희 부모님이 단 한번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하는 결정을 항상 존중해 주셨고 지지해 주셨을 뿐, 절대 판단하시거나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의 지지 하에 나에게 맞는 공부 방법, 나에게 맞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만 제대로 찾아도 모든 방면에서 몰라보게 효율성이 올라갈 것입니다. 남들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공부하고, 남들이 저렇게 해서 거기에 흔들린다면 결국 나만을 위한 해결책은 끝까지 찾기 힘들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꼭 이루고 싶다면, 잘 놀고, 열심히 공부하며, 건강한 습관을 유지하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이 부분에 대해서도 꼭 심도 있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J 쌤]
Potential. Especially as a high school student, I heard this word often when it came to describing the quality of my work, who I was as a student, or my future. Sounds positive, right? That’s certainly how I took it at the time, but as I looked back on these memories as an adult, I realized how accurately this single word describes who I was back then: a student with some positives, but who was capable of so much more.
To tell the story briefly, my family strongly valued education, so I was raised with good academic habits. After all, as an only child, it was also harder to escape or avoid the consequences when I made mistakes. Yet my motivation waned academically in my late middle school and early high school years. I had been very fortunate to have a pure, sheltered childhood, and some of the realities of life started to say hello at that time. My parents began their path toward divorce, I struggled to cope with death through the loss of my grandmother, and yes, I experienced high school relationships like what you see in many Hollywood productions.
I didn’t lose all of my good foundation, however, and I certainly looked like a student with potential. Most days, I paid attention in class and took notes diligently. With the help of sports and extracurriculars, I also became comfortable taking tests and performing under pressure. But over time, classwork and reading needing to be done at home started to disappear. Essays and projects became rushed, and my interest and effort weren’t consistently visible from my teachers’ perspectives. I definitely heard more about my “potential” in my last two years of high school than in the first two.
At that time, I thought my teachers were being kind and supportive, and so I took their messages as only something positive. One of the great ironies of my life is that as a teacher today, I now know that yes, they were being very kind and supportive. But they were also powerless because of my own declining engagement. My choices and journey showed them that I was not yet ready to accept all they had to give me, and so I tied both their hands and my own. Even still, they showed me this kindness.
My academic journey from that point was a long, uphill one, as you can imagine, but that’s not my focus here. Instead, as I’m sure you see, potential is a word I don’t use very often, even today. Yet I am learning every day to be grateful for it. I still carry the wisdom of lessons such as these, that my teachers have passed on to me, and I often find myself sharing this story with our CAL EDU students to help them navigate their own academic and personal roller coasters. Each time, I feel my teachers smiling over my shoulder.
[Hannah 쌤]
전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아이였습니다.
지금 단연코 선생님들 중에 가장 목소리가 큰, 발자국 소리도 제일 큰, 화났을 때 보이는 눈의 흰자 부위도 제일 큰, 덩치도 제일 큰 한나 선생님과는 영 안 어울리는 모습이지만, 전 정말 방구석에 앉아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그런 아이였죠.
공부는 늘 잘하는 편이었고 (죄송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정말 무서운 엄마의 얼굴이 떠 올라서 전 당연히 서울대에 가야 하는 줄 알던 그런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영재교육도 받았고, 교육청에도 여러 번 불려 갈 만큼 동네에선 나름 제일 똑똑하다고 소문난 그런 아이였는데……. ㅠㅠ
갑자기 이민을 오게 되고, 초등학교 5학년을 미국에서 시작하게 되었죠.
처음엔 정말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한국에서 공부를 잘했던 말았던 다 필요 없고, 외국어로 모든 과목을 공부하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자꾸 수업 시간에 미국쌤이 삼발이 삼발이… 실험 시간에 쓰던 알코올 버너 올려놓는 삼발이가 발이 세개라서 삼발이 아니었나? 모르는 단어인 Somebody 가 저한테는 그저 자꾸 삼발이로 들리고…
부모님의 기대치는 하늘을 찌르는데, 학교에는 백인들만 있고, 영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에 하루 종일 A, B, C 알파벳만 쓰던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이를 악물고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던 일이 있었는데요….
그날도 선생님은 제게 영어로 뭐라 뭐라 하셨습니다. 물론 전 못 알아들었죠. 한참을 뭐라 하시다가 제 공허한 눈빛을 눈치채시고는 어디선가 남학생을 한 명 데리고 오셨습니다. 와우, 얼마나 반갑던지요. 다 백인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동양인이라뇨…
그 친구가 선생님과 뭐라 뭐라 하더니 제게 다가와 매우 어색한 발음으로 이야기 합니다.
Ummm … Listen …. 내일…… um ….. 내일……. Um ….. 피크닉 가. 런치 브링.
피! 크! 닉! 그리고 런! 치! 제가 아는 몇 안 되는 단어들이었죠.
뭐라고? 소풍 간다고? 아싸!!!!
그 뒤로도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엄… 내일…. 내일….. 엄….. 피크닉…. 런치 브링…해
알았다고!!! 전 휘파람을 불며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도시락을 싸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늘색 멜빵 바지에 도시락을 껴안고 학교에 갔는데, 이게 웬일? 다들 그냥 평범한 복장으로 수업을 하고 있었었습니다. 기분이 쎄에… 했지만, 설마..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다가오시더니 책을 꺼내라는 겁니다.
“노 북 투데이. 피크닉 투데이.”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막 화를 내시면서 또 알아듣지 못할 말을 뭐라 뭐라 하시는 겁니다. 정말 저도 많이 화가 났습니다.
쉬는 시간에 울면서 뛰쳐나가서 어제 그 동양 남자애를 쥐 잡듯이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 친구가 보이는 순간, 뛰어가서 따져 물었습니다.
“야! 네가 오늘 피크닉 간다며? 런치 가지고 오라며?”
그랬더니 그 친구가 엄청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내일…. (침 한번 삼키고) 엄…. 내일…..
아뿔싸… 내일 모레를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그렇게나 내일 내일을 여러 번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입양아였고, 한국말을 많이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너무 답답한 선생님께서 온갖 수소문을 하셔서 제게 통역을 시켜주신 것 이었고,
Day after tomorrow …. 이 말을 한글로 말하지 못해서, 내일…. 그리고 또 내일… 이라고 표현한 것을 저는 내일을 강조하는 줄 알고 책가방 팽개치고 도시락만 달랑 들고 학교로 갔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반 전체가 비웃는 상황.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던 그 날 이후로 저는 정말로 닥치는 대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전학을 하고 6학년을 마칠 때에는 졸업생 대표로 미래에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에 대한 연설을 하기도 했고, 중학교 졸업식에도 전교 학생회장 자격으로 졸업사를 맡았습니다.
언어가 부족하면 움츠려 드는 어깨는 물론, 자격지심, 불안감이 함께 옵니다.
언어가 능통하면 어딜 가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영어 실력이 탄탄해지면서, 학교 생활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소극적이었던 성격도 활발하고 리더십을 갖춘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에게도 최대한 빨리 언어장벽을 넘을 수 있게 해 주고 싶고, 문화도 이해하도록 하고 싶고, 어쩔 수 없이 겪게 될 좌절과, 그것을 극복했을 때에 함께 따라오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 주고 싶습니다.
[Ted 쌤]
저는 어릴 적부터 친구들을 좋아하는 활발한 학생이었습니다. 한 해도 학급회장은 빼놓은 적이 없고, 학생회와 전교회장도 했습니다. 공부도 늘 곧 잘했고, 학교에서 열리는 경시대회, 미술대회 등에서는 날 상위권에 있었습니다. 학교 대표로 구연동화 대회에 나가서 전국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적도 있고, 다른 대회에서도 많이 입상했습니다. 소위 말해 ‘모범생’으로 살았습니다. 늘 옆에는 어머니께서 함께 해주셨는데, 어머니는 한 번도 저에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 대회에서 상을 받아야 한다 강요하셨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늘 그림자처럼함께 해주시고 옆에서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께서 기뻐하는 그 모습이 다 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끊임없이 학업적으로 노력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자라던 당시에 쇼트트랙을 배웠다거나, 단소와 플룻 그리고 클라리넷을 배웠다는 것은 사실 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특이한 것을 시켜주려는 어머니의 부단한 노력 덕분에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것들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영어도 조금 남들보다 일찍 배웠습니다. 제가 영어학원이라는 것의 문턱을 밟아본 것은 7살 때입니다. 그 당시 다니던 유치원에서 영어 수업이 있었는데 영어선생님의 권유로 어머니께서 영어학원을 보내기로 마음 먹으셨다고 합니다. 토종 한국인치고 제 영어 발음이 들어줄 만한 것은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던 것이 한 몫 한다고 믿고 살고 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첫 시험에 전교 4등을 합니다. 졸업할 때까지 전교 10등 안에는 계속 들었으며 공부는 줄 곧 잘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또래 친구들에 비해 배움의 의지도 컸고, 어머니께 다니고 싶은 학원, 원하는 과외 선생님을 정확하게 알아와서 부탁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더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고 하기 싫어하는 것은 강요하지 않고 다만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만 인지시켜 주셨던 저희 어머니의 확고한 교육철학 덕분에 저는 항상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컸습니다.
늘 승승장구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뒤늦게 외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1년 이상 준비를 했던 것을 저는 급하게 준비하면서 결국은 첫 실패를 맛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어머니께서는 실패도 경험으로 삼고 배우는 것이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그 패배의 슬픔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저는 고등학교 내내 영어 공부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반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다시 전교권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였고,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교장, 교감선생님은 저는 당연히 서울대학교에 가야 하는 줄 아셨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다시 한 번 시련이 찾아옵니다. 저는 사실 시험에 좀 약한 편입니다. 시험일에는 긴장을 잘해서 그 긴장감으로 평소 실력보다 점수를 잘 받지 못하는 편입니다. 평상시의 내신은 잘 받았지만, 수능 당일 수능을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못 보면서 목표했던 서울대 진학은 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서는 재수 비용 전액 지원해 줄 테니 제발 다시 공부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 당시에 합격한 지금의 제 모교로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저의 생활에 후회가 없었고, 합격한 학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서 그냥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저에겐 더 큰 시간적인 이득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학교에 진학하여 대학교 4년 과정 그 누구보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 당시 대학원에 진학하여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한시도 쉬지 않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복수 전공까지 하면서 학점은 4.5를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4년 만에 학부과정을 졸업하고 이어서 대학원에 석사과정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원 석사과정도 정말 열심히 하여 마무리했습니다. 대학교와 대학원은 부모님께 도움이 되어드리고자 거의 전액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고, 대신 부모님께서 준비해두셨던 비용의 일부를 지원 받아 방학에는 열심히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것이 제가 학생으로서 살아온 모습입니다.
써 놓은 글을 보니 상당히 공부만 하고 산 재미없는 사람으로 보이네요. 하지만 저는 할 것도 다 해봤습니다. 대학교 동아리 생활도 열심히 해보았고, 과 학생회 임원도 했습니다. 친구들과 20대에만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유흥문화도 즐겨보았습니다.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땐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어른들이 훈계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지요. 하지만 옛 어른 말씀 틀린 것 없고, 부모님 말씀 잘 들어서 절대 손해 볼 일, 아니 무조건 득 되는 일만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해야 할 시기에 저의 호기심을 적절하게 잘 자극해 주셨던 어머니의 교육이 없었다면 저는 어쩌면 상당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CAL EDU에서 저도 학생들에게 저희 어머니 같은 교육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시기에 이뤄내면 분명히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뒤따라온다는 것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Mason 쌤]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저는 굉장히 활발하고, 장난기 많고, 목소리도 큰 아이였어요. 그래서 어딜 가나 문제도 많이 일으키고, 친구들하고 많이 싸우고, 또 선생님들께 말대꾸도 많이 하던 말을 안 듣는 학생이었어요. 하지만 공부 할 때는 집중해서 잘 했던 터라 어렸을 때에는 그런 제 자신을 많이 특별하다 생각하고 자존 감이 높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중학교에서도 이렇게 지내면 문제없겠지..”라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중학교를 올라가 첫 시험을 치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처음 제 위치를 알게 되어 나는 잘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였죠. 이후에 사춘기를 겪으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라는 생각과 함께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초등학생 때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힘없는 학생들을 대변해서 나쁜 친구들에게 맞서는 데에 쓰기도 하며 좋은 방향으로 많이 변화했던 것 같아요. 여전히 목소리는 커서 담임선생님께 경례를 할 때 자주 득음을 하냐는 말씀을 종종 듣긴 했지만요. 그렇게 중학교 3년을 공부에 몰두하고 올바른 학생처럼 지냈던 것 같아요. 간혹 저희 어머니가 학교에 방문하실 때 어떤 선생님은 저희 어머니를 부둥켜 안으려고 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부터 생각이 많아졌어요, 고등학교마저 그렇게 피곤한 3년간의 학교생활을 할 자신이 없었고, 또 원래 성격은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저 눈에 띄지 않는 학교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그런 거 나중에 신경 쓰고 공부나 하라”라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고민을 했었기 때문에 더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이후에 공부한 것들이 아깝지 않냐며 말리시던 많은 사람들에게 전혀 아깝지 않다고 더 단호하게 말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미 그만큼 모든 고민과 걱정은 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그 결정이 지금 제가 많은 것들에게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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